조선에서 전등이 처음 켜진 집이자, 국모가 스러진 새벽의 궁 🏛️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지 131년이 되는 날이 사흘 뒤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 건청궁은 조선 후기의 중요한 정치 공간이자, 우리나라에서 전등이 최초로 켜진 전기 조명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는 가을마다 평소 내부 관람이 제한된 건청궁과 향원정을 여는 특별 관람을 운영해 왔습니다. 2025년 가을 기준으로 10월 15일부터 31일까지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두 차례, 회당 20명에 1만 원(입장료 포함)이었습니다. 올해 일정은 궁능유적본부 공지를 참고해 주시길 권합니다.
새벽의 궁, 등불이 밝힌 흔적부터 볼까요 🏮
건청궁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던 생활 공간입니다. 왕의 공간인 장안당과 왕비의 공간인 곤녕합이 복도로 이어진, 궁 안의 작은 궁이었지요. 궁능유적본부 보도자료(2025년 10월 1일)는 이곳을 "왕실의 주요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자 "명성황후가 시해된 안타까운 장소"라고 짚습니다.
제가 이 공간에서 먼저 보고 싶은 것은 그 흔적의 이중성입니다. 전등이라는 새로운 빛이 처음 켜진 집이, 같은 시기 세력의 침공 앞에 무방비하게 드러난 집이기도 했다는 것.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광화문·춘생문·추성문으로 궁을 포위했을 때, 가장 깊은 생활 공간이 곧바로 사건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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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 기록이 남긴 순서
사료를 따라 그날의 앞뒤를 순서로 짚어 보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의 정리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그러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조선 내정 간섭이 어려워지고, 조선 정부는 친러 정책으로 전환
- 1895년 9월 1일: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주한 일본 공사로 부임
-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과 일본군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을미사변)
- 사건 직후: 친일 내각은 일본인의 참여를 부정하고 명성황후의 잘못을 열거한 폐후 조칙을 발표, 시신은 훼손·소각됨
- 이후: 미우라 등 관련자 48명이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면소
-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 반포. '국수보복(國讐報復)'을 명분으로 한 을미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
- 1896년 2월: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 같은 해 11월 22일 명성황후의 국장이 마무리되며 그녀는 '황후'로 승격
목격자의 증언도 외교 문서로 남았습니다. 베베르 등 주한 외국사절들은 이 사건을 일본인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미우라 공사를 추궁했습니다. 살해가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 범죄였다는 점은 당대 기록과 외국인의 증언이 함께 가리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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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두 개의 기록, 그리고 이름의 격
명성황후에 관한 평가는 살아생전부터 갈렸습니다. 우리역사넷에 실린 두 기록을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씀씀이에 도무지 절도가 없어서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둔 돈이 모두 동이 났고 이로부터 매관매직의 폐단이 시작되었다.
황현,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대화 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쪽은 조선의 야사, 한쪽은 조선을 직접 방문한 영국 지리학자의 기행문입니다. 우리역사넷은 이어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덧붙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료에는 '민비(閔妃)'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으며, 이 호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10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 기사라는 것입니다.
그녀가 '명성황후'가 된 것은 죽은 뒤의 일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왕비로 지내다가,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비로소 '황후'가 된 것이지요. 이 이름의 격(格) 자체가 나라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던 고종의 정치와 맞물린 결과였다는 설명이 우리역사넷 해설에 나옵니다.
| 기록 | 성격 | 제가 본 기준 |
|---|---|---|
| 『매천야록』 (황현) | 한말 47년을 기록한 야사 | 왕비의 시정을 비판하는 시대의 시선. 희생양 구도를 새겨 읽을 필요가 있음 |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비숍) | 조선 방문 기행문 | 직접 만난 사람의 목격 기록 |
| 주한 외국사절·목격자 증언 (베베르 등) | 외교 문서와 증언 | 사건의 국제적 추궁을 남긴 근거 |
| 궁능유적본부 보도자료 (2025.10.1.) | 관리 기관 공식 해설 | 건청궁·향원정의 오늘의 위상과 관람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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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시 볼 디테일
명성황후의 국장은 몇 차례 연기되다 1897년 11월에야 치러졌습니다. 그녀가 스러진 뒤 두 해가 더 지난 길이었지요.
그렇다면 오늘의 특별 관람에서 무엇을 봐야 할까요. 궁능유적본부 소개대로 장안당과 곤녕합을 잇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왕의 집무·생활 공간과 왕비의 공간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짚어 보시길 권합니다. 곤녕합 동쪽 옥호루는 그날 사건이 이루어진 현장으로 기록된 자리입니다. 건청궁 앞 연못 가운데 세워진 육각 정자 향원정은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뜻을 지닌 보물로, 왕과 가족의 휴식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오래 서 있고 싶은 자리는 곤녕합에서 연못 쪽으로 내다보는 한 켠입니다. 전등이 처음 켜진 집의 불빛과, 131년 전 그 새벽의 어둠을 같은 자리에서 겹쳐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사건의 현장이 오늘은 해설과 함께 열리는 배움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이번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마음에 남는 연결입니다.
사흘 뒤 10월 8일, 그 새벽의 날짜를 한 번쯤 기억해 보는 일에서 시작해 보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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