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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미술관

[그림 앞에서] 박서보, 마지막 백색 묘법 세 점 — 흰 재료가 남긴 한 가지 질문

그림 앞에 오래 머무는 세연이에요. 오늘은 지난 8월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문을 연 박서보미술관의 개관전에서, 박서보 화백이 남긴 마지막 흰색 세 점을 한 점씩 오래 읽어 볼게요. 미술관 공개 해설과 기사 자료로 들여다보는 한 점이에요.

박서보, 묘법 No.230127·No.230128·No.230129, 2023, 캔버스에 한지와 혼합매체, 각 330×192cm
박서보, 묘법 No.230127·No.230128·No.230129, 2023, 캔버스에 한지와 혼합매체, 각 330×192cm
출처 · culturelamp.kr

선을 긋고 밀어내기를 반복해 화면을 비워내는 그림. 비워낸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 걸까요.


이 작은 면에서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의 마지막 전시실은 8m 높이의 큐브 공간이에요. 이곳에 백색 묘법 연작(2023) 세 점이 걸려 있어요. 화백은 미술관이 건립되면 이곳에 걸릴 것을 미리 생각하며 세 점의 백색 연작을 구상했다고 해요. 각각 330×192cm, 사람 크기를 훌쩍 넘는 흰 화면이에요.

이 세 점만을 위해 세워진 공간에서는 형태와 색채가 극도로 절제되고, 화면에는 빛과 물질의 섬세한 흔적만 남아 있어요. 가까이 서면 한지가 만든 미세한 요철이 빛을 받는 순간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여요. 오래 서 있을수록 화면이 점점 깊어지는, 드문 종류의 그림이에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가 흐엉 도딘이었고, 두 분 모두 반복과 축적을 통해 화면을 비워내는 작업으로 예술적 여정을 이어 왔다는 점에서 통할 것 같아 개관전 작가로 초대했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 2026. 8. 18. 기자 설명회(컬처램프)

재료를 다시 읽으면

묘법의 재료는 단순해요. 물에 불린 한지를 덧댄 화면 위에 선을 긋고, 다시 밀어내요. 작품 표기인 캔버스에 한지와 혼합매체만 보면 담백한데, 그 밑에는 반복된 행위와 시간이 겹겹이 깔려 있어요. 박서보의 흰색은 칠해서 만든 흰색이 아니라, 덧댄 한지의 물성과 지워지고 남은 흔적이 함께 만든 흰색이에요.

마주 보는 자리의 흐엉 도딘(Huong Dodinh, b. 1945)은 다른 길로 흰색에 다가가요. 베트남 속짱에서 태어나 195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지금까지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작가예요.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겹 쌓아 올려 빛이 화면 안에서 스스로 발현되는 깊이를 만들어요. 재료와 방식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무언가 더하기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쪽으로 걸어 왔어요. 비워진 화면은 비어 있는데도 밀도를 품는다는 게 이 전시가 말하는 축이에요.

만남이 남긴 한 점

이 전시에는 이야기가 담긴 한 점이 더 있어요. 2023년 여름, 도딘이 연희동 작업실을 찾았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도 통역을 거쳐 세 시간을 이야기했어요. 대화 끝에 박서보가 '자연은 나의 스승'이라고 말하자, 옆에서 통역하려던 도딘의 아들이 '다 이해했다'며 더 옮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프랑스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 박서보가 세상을 떠났어요.

도딘은 그날의 만남을 기억하며 흰 바탕 위에 백색 안료를 겹겹이 쌓아 올린 추상화 X.K.N.31(2025–2026)을 완성하고, 이 작품을 화백에게 헌정했어요. 같은 흰색이라도 한지를 밀어낸 흰색과 광물 안료를 쌓아 올린 흰색은 결이 달라요. 두 흰색이 한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만든 큐레이션이, 이번 전시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이에요.

흐엉 도딘, X.K.N.31, 2025–2026, 설치 전경. 2023년 박서보와의 만남을 기억해 제작, 화백에게 헌정한 작품
흐엉 도딘, X.K.N.31, 2025–2026, 설치 전경. 2023년 박서보와의 만남을 기억해 제작, 화백에게 헌정한 작품
출처 · culturelamp.kr

박서보 선생님은 위대한 예술가를 넘어 작품을 통해 인간다움을 전하는 분이셨다. 비록 같은 언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창작은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

흐엉 도딘, 컬처램프 인터뷰 인용(2026. 8. 18.)

지금 볼 수 있는 자리

전시는 미술관의 세 전시실을 거쳐 흘러가요. 지하 2층 SPACE Ø에서는 1990년대 작품이 함께 전시돼요. 안성 작업실의 황토 바닥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박서보의 황색 계열 작품과, 어린 시절의 베트남과 여름마다 찾는 남프랑스 그라스의 풍광을 담은 도딘의 작품이 하나의 고요한 풍경처럼 이어져요.

개관전 도입부와 B2 SPACE Ø 전경 / 2층 전시장, '아궁이색'이라 불린 짙은 회색 계통의 묘법 연작 / 박서보미술관 외관(연희동 작업실 옆, 건축가 최문규 설계)개관전 도입부와 B2 SPACE Ø 전경 / 2층 전시장, '아궁이색'이라 불린 짙은 회색 계통의 묘법 연작 / 박서보미술관 외관(연희동 작업실 옆, 건축가 최문규 설계)개관전 도입부와 B2 SPACE Ø 전경 / 2층 전시장, '아궁이색'이라 불린 짙은 회색 계통의 묘법 연작 / 박서보미술관 외관(연희동 작업실 옆, 건축가 최문규 설계)
개관전 도입부와 B2 SPACE Ø 전경 / 2층 전시장, '아궁이색'이라 불린 짙은 회색 계통의 묘법 연작 / 박서보미술관 외관(연희동 작업실 옆, 건축가 최문규 설계)
출처 · culturelamp.kr

2층에서는 흑색 한지묘법과 색채 한지묘법으로 묘법의 변화를 볼 수 있어요. 작가가 '아궁이색'이라 불렀던 검은 회색 화면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향한 기억이 담겼고, 붉게 타는 듯한 단풍색을 비롯한 색채 작품에는 자연 속에서 치유와 위안을 얻고 싶었던 마음이 스며 있다고 해요. 그리고 마지막 3층 큐브에서 오늘의 세 점을 만나요.

전시 기간은 2026. 8. 21.(금) – 2027. 1. 3.(일)이에요. 두 작가의 회화 42점(박서보 25점, 흐엉 도딘 17점)이 박서보미술관 전관에서 함께 전시돼요.

전시명박서보와 흐엉 도딘 : 비움 그 충만(개관전)
기간2026. 8. 21.(금) – 2027. 1. 3.(일)
장소박서보미술관 전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운영화–일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5,000원
  • 같은 흰색, 다른 재료 — 박서보의 한지와 도딘의 광물 안료가 만드는 흰색의 결을 번갈아 비교해 보기
  • '아궁이색'이라는 이름이 화면의 회색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기억과 색을 연결해 보기
  • X.K.N.31 앞에서 잠시 멈추고, 2023년 여름 세 시간의 대화를 떠올려 보기

재료의 표기는 담백한데, 그 앞에 서 있으면 시간이 걸려요. 나는 흰 화면 한가운데에서 선이 그어졌다 지워진 자리를 계속 보게 돼요. 비워낸 자리에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 오늘의 이 작은 발견을 오래 가져가고 싶어요.

저는 이 작은 질문을 남겨 둘게요. 다음 그림 앞에서 또 만나요.

참고 자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

전시장에서 작은 면 하나에 오래 머무는 사람의 미술 전시 메모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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