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앞에 오래 머무는 세연이에요. 오늘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11월 8일까지 열리고 있는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회고전에서, 〈농원〉이라는 한 점 앞에서 오래 서 있어 본 이야기를 꺼내 왔어요. 미술관 공개 해설과 전시 자료로 들여다보는 한 점이에요.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멀리서 보면 과수원이고, 가까이 오면 색실이에요. 색과 색이 섞이지 않고 각자의 빛으로 자리를 지키는 이 화면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 작품명 | 〈농원〉 |
|---|---|
| 작가 | 이대원(李大源, 1921–2005) |
| 제작 연도 | 1979 |
| 재료·크기 | 캔버스에 유화 물감, 150×230cm |
| 소장처 | 개인 소장 |
이 작은 면에서 — 섞이지 않는 색실
〈농원〉 앞에서 제 발이 멈춘 지점은 아주 사소한 곳이었어요. 파란 점 옆에 노란 점이 놓여 있는데, 두 색이 사이를 두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고요. 익숙한 서양 회화의 점묘라면 관람자의 눈에서 두 색이 섞여 초록으로 번져야 할 텐데, 이 화면은 그렇지 않았어요. 색이 만나지 않고, 나란히 축적돼요.
이대원의 색점은 서양 점묘법처럼 관람자의 눈에서 섞여 보이도록 한 기법이 아니다. 자수의 색실처럼 각각의 색이 고유한 빛을 유지한 채 화면 위에 축적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연합뉴스 기사(2026. 8. 5.) 중
바늘땀으로 박은 색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져요. 자수에서 빨간 실과 파란 실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아요. 그런데 실이 촘촘히 놓이면 두 색의 사이에서 오히려 더 선명한 빛이 살아나죠. 〈농원〉의 과수원은 물감을 붓으로 바른 화면이라기보다, 수십 년 동안 한 땀 한 땀 쌓은 거대한 자수에 가까웠어요.
재료를 다시 읽으면 — 공예의 빛을 유화로 옮기다
이 화면의 답은 미술관 공개 해설에 적혀 있었어요. 이대원은 자수와 나전칠기, 화각, 목가구 같은 한국 전통 공예의 색과 빛, 동양화의 운필과 조형 원리를 오래 연구한 화가였어요. 다만 그 전통이 화면에 그대로 그려지는 건 아니었죠.
자수의 색실, 나전칠기의 빛, 화각의 투명한 색, 동양화의 운필과 준법은 그의 화면에서 직접적인 재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색선과 색점, 색면이 중첩된 현대 회화의 언어로 전환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시 해설
나전칠기의 자개를 떠올려 보세요. 어두운 옻칠 바탕 위에 박힌 자개는 제각기 다른 각도로 빛을 반사하며 조용히 반짝여요. 전시 해설은 이대원의 색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화면 안에 박혀 쌓인다고 말해요. 신인상주의 점묘의 빛이 화면 위에 떠 있는 것과 달리, 그의 빛은 표면 안쪽에 박혀 있는 거예요.
이 재료의 선택은 시간과 함께 자라났어요. 이대원은 1970년대부터 파주 농원에 화실을 마련하고, 오디오가이드 해설에 따르면 주말마다 흙바닥에 주저앉아 30년 동안 꼬박같이 같은 풍경을 그렸어요. 같은 장소였는데 화면은 매번 달랐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짧은 색점은 길고 자유로운 색선으로 확장되고, 풍경의 원근감은 점차 희미해져요. 멀리서 보던 풍경이 점점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산수의 공간이 되어 갔어요.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흰 담 안의 자개 — 〈담(秘苑)〉 옆에서
이 색의 원리가 대형 화면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보려면 〈담(秘苑)〉을 꼭 들러야 해요. 가로 5미터가 넘는, 외교부가 소장한 이 작품은 오랫동안 주미한국대사관에 설치돼 한국 회화의 미감을 전해 왔다고 해요. 흰 담과 나무가 어우러진 평온한 정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흰 담은 단일한 흰색이 아니에요. 미색과 분홍빛, 푸른빛이 감도는 여러 색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나란히 놓이고, 각각의 색이 독립적으로 발색해요. 어두운 바탕에 박힌 자개가 제각기 빛을 내듯 말이에요. 나는 이 화면에서 원색의 환희가 아니라 절제된 축적을 만났어요. 〈농원〉에서 느꼈던 색실의 질문이, 흰색 안에서 다시 한번 대답을 듣는 순간이었어요.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이대원의 위상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연합뉴스 기사(2026. 8. 5.) 중
이번 전시는 국공립 미술관에서 처음 열리는 이대원의 대규모 회고전이에요. 1930년대 초기작부터 말년의 대형 회화까지 유화 120여 점과 아카이브 100여 점이 덕수궁의 한옥 전시실을 따라 이어져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익숙한 수식어 너머에서, 전통과 현대를 잇는 색채의 오랜 실험을 따라가 보는 자리였어요.
지금 볼 수 있는 자리
| 전시명 |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
|---|---|
| 기간 | 2026. 8. 6.(목)~11. 8.(일) |
|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1·2·3·4전시실 |
| 관람료 | 2,000원 (덕수궁 입장료 1,000원 별도) |
| 구성 | 유화 120여 점, 아카이브 100여 점 |
관람을 앞두신 분께는 두 가지를 곁들여요. 먼저 오디오가이드가 작품별 해설을 26개 트랙으로 공개하고 있어서, 미술관에서 듣기 전에 웹에서 미리 읽어도 좋아요. 그리고 10월 7일부터 28일까지 덕수궁에서 전문가 강좌 ‹이대원 회화 다시 보기›가 이어지니, 그림을 더 깊게 두 번 보고 싶은 분께 어울려요.
전시실에서 물어볼 질문을 세 개만 챙겨 갈게요.
- 가까이 섰을 때 색이 섞이는가, 각자의 빛을 지키는가
- 같은 〈농원〉이라도 연도가 다른 화면에서 색점이 색선으로 변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는가
- 흰 담이라고 믿었던 면이 실은 몇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나는 원색의 화려함보다, 그 화려함이 만들어지기까지 쌓인 절제의 시간이 좋았어요. 같은 풍경을 30년간 바라보는 일은 화려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섞이지 않는 색이 결국 가장 찬란한 빛이 된다는 것, 그 작은 면을 이번 전시에서 오래 붙잡아 두고 싶어요.
저는 이 작은 질문을 남겨 둘게요. 다음 그림 앞에서 또 만나요.
댓글 0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