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앞에 오래 머무는 세연이에요.
종이 한 장이 건물의 표면을 통째로 기억할 수 있을까요?
국립현대미술관 공개 해설과 전시 자료로 들여다보는 한 점이에요.
오늘 고른 자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서도호》 전시예요. 2026. 8. 27.부터 내년 2. 9.까지, 유년기 그림부터 신작까지 500여 점이 서울관을 채우고 있어요. 그 가운데서 저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성북동 한옥의 별채를 종이로 되살린 〈러빙/러빙: 서울 집〉(2013~2022) 앞에 오래 서 있게 됐어요. 문지르다(rubbing)와 사랑하다(loving)의 발음을 맞춰 붙인 제목처럼, 벽을 문지르는 몸의 시간이 사랑이라는 말로 번역돼 있는 작품이에요.
| 작품명 | 러빙/러빙: 서울 집 (Rubbing/Loving: Seoul Home) |
|---|---|
| 작가 | 서도호 |
| 제작 연도 | 2013~2022 |
| 재료 | 닥지에 흑연, 스테인리스 철사 |
| 크기 | 534×866×802.5cm |
| 출품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도호》 전시(2026. 8. 27.~2027. 2. 9.) |
재료를 다시 읽으면
재료는 닥지에 흑연, 그리고 뼈대의 스테인리스 철사가 거의 전부예요. 작가는 한옥 별채의 외벽 전체에 한지를 밀착시키고 약 1년간 흑연으로 문질러 나뭇결과 문살, 표면의 굴곡까지 떠냈어요. 그 한지를 벽에서 떼어내 뼈대 위에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집이 완성돼요. 종이 한 장에 1년의 문지름이 쌓인 셈이에요.
흑연은 색을 더하려는 재료가 아니라 압력을 기록하는 재료였다고 읽게 돼요. 손이 여러 번 지나간 자리는 짙어지고, 닿지 않은 자리는 흰 채로 남아요. 미술관 해설에는 작업을 마친 한지가 건물에서 떨어질 때 '쩍' 하는 소리가 났다는 문장도 있어요. 떼어내는 순간의 소리까지 남겨 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떠올린 단어로 '회향(回向)'을 꼽았어요. 작가의 집에서 출발한 기억이 관람객 각자의 집과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에요. 그 말대로 이 탁본 한옥은 누군가의 낡은 벽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내 공간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 같아요.
제 작품을 보며 자신의 집과 인생을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 긍정적인 무언가를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어요.
서도호, 2026. 8. 26. 서울 기자간담회(경향신문 보도)
함께 두고 볼 디테일
이번 전시는 천이라는 재료의 변주도 함께 읽으면 좋아요. 런던의 지금 집을 실제 크기로 재현하고 여섯 곳의 집에서 가져온 문손잡이와 콘센트, 스위치를 원래 위치에 붙인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2024), 서로 다른 도시의 방과 복도, 문을 22m 길이로 이은 〈둥지/들〉(2024)이 그 주인공이에요.
공간이 넉넉치 않아 전체를 설치하지 못했던 〈아파트 A, 복도와 계단, 미국 뉴욕 웨스트 22번가 348번지, NY 10011〉(2012, LA 카운티미술관 소장)는 12월 18일부터 서울박스에서 전체 유닛으로 처음 선보인다고 해요. 한 번의 방문으로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어요.
지금 볼 수 있는 자리
| 전시명 | 《서도호》 |
|---|---|
| 기간 | 2026. 8. 27.(목) ~ 2027. 2. 9.(화) |
|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지하1층 3·4·5전시실, 2층 MMCA 스튜디오 |
| 관람시간 | 월·화·목·금·일 10:00~18:00, 수·토 10:00~21:00 |
| 관람료 | 8,000원, 1시간 단위 회차 예약제 |
| 문의 | 국립현대미술관 02-3701-9500 |
작품을 읽을 질문을 세 개만 적어 둘게요.
- 한지가 벽에서 떨어질 때의 '쩍' 소리 — 이 작업에서 1년의 시간은 어디에 쌓여 있을까요
- 색을 더하지 않은 흑연인데, 왜 나뭇결과 문살이 그렇게 선명할까요
- 작가의 한옥 대신, 내가 오래 살았던 공간 하나를 떠올려 본다면 어디일까요
저는 이 한 점에서 색이 없는 재료가 가장 많은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배웠어요. 재료를 알고 나니, 벽에 손을 대지 않은 사람도 벽의 시간을 함께 견딜 수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해요.
저는 이 작은 질문을 남겨 둘게요. 다음 그림 앞에서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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